여름부터 달리기 1일 차
7/15 am 6:10 - 6:30
달리고 싶다, 고 생각한 지는 한참 됐다. 머릿속이 뿌옇게 헝클어지면 깨끗하게 만들 길은 운동뿐이다. 집중력이 현저하게 떨어지고 스트레스가 높다. 시간이 멱살을 쥐고 흔든다는 생각이 든 지는 반년 정도 됐는데 어제는 문득 시간이 없는 게 아니라 자신감이 없는 거란 걸 깨달았다. 무엇을 해야 할 때, 방법을 모르거나, 방법을 알지만 잘 해낼 힘이 없다고 스스로 믿는 상태. 나는 나 자신을 믿을 수 있는 상태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저께 아들들 라이딩 순서가 엉켜 큰 애가 짜증을 부릴 때 차를 집 앞 불가마집 주차장에 세워놓고 울었다.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몰랐다. 이럴 땐 그저 몸을 움직여. 뛰어. 누군가, 어쩌면 영혼의 안내자가 말해 주었다.
나는 어렴풋하지만 근 1-2년 사이에 영혼은 원하는 걸 내어주는, 품이 영혼같은 분이라는 걸 믿게 되었다. 무엇을 믿는지가 삶의 퀄리티를 만들어 준다는 가설의 증명들도 찾고 있다. 나는 가족이라는 영혼의 공동체에 흐르는 에너지를 순하고 따뜻한 것으로 전환되길 바랐다. 가장 먼저 한 일은 나의 에고들 슬픔, 억울함, 분노, 위로 사랑 감사 이해 등 받고 싶은 모든 마음을 뒤로 두는 것이었다. 나는 그저 상대를 곱고 선한 것으로 비춰주는 거울로써 존재하는 연습을 했다. 폭발하는 감정, 쏟아지는 말들을 삼갔다.
눈물이 터진 날에도 아들에게 '엄마가 (집에서)일하는 사람이라는 걸 기억해'라는 메시지를 주고서, 차를 돌렸다. 아이를 내려주고 곧바로 차를 돌린다는 게 무척 엉뚱한 일이지만 이 정도로만 하고 돌아서서 주차장에 코 박고 잠깐 울었으니. 차오른 압을 스스로 해결하려고 노력한 셈이다. 집에 가서 밥을 내고 싹싹 비운 아들들과 하이파이브를 했다. 이렇게 하면 되는 거구나. 2년 전 나라면 당장 피해자가 되어 아들의 연민을 구걸했을 거다.
가족 관계 안에는 무척 고유한 에너지가 흐르고, 이 에너지의 강력한 영향권 안에 우리들이 놓여있다,고 믿는 것. 이 믿음이 나의 태도를 제어한다. 고운 것으로, 순한 것으로 향하도록 한다. 행여 뜨겁게 돌진하고 싶은 에고가 등장하면 멈칫하도록 작동한다. 믿는 것들의 모음집이 삶일 것이다.
어제도 팀 보고서, 아르바이트, 주문 건 제작 등 밀린 일을 해야만 했다. 역시 시간이 부족했다. 나는 만들고 또 만들었다. 뜯고 또 뜯는 반복 때문에 스트레스가 극으로 치달았다. 이 스트레스를 잘 다루고 싶었다. 우리의 에너지를 위해서. 팀 보고서를 미뤄달라고 요청했다. 나에게는 우선순위가 있으니 다음의 것들을 책임지자는 마음이었다. 그러고 나서 아이들 저녁밥, 갈비탕과 오리고기 차리고 먹이고 치우고 보고서 작업에 들어갔다. 이런 멈칫한 사고가 없었다면 아이들 밥을 차리는 일에 스트레스를 표현하거나, 배달 음식으로 해결했을 것이다. 자정이 가깝도록 보고서 초안 작성을 마쳤다. 몰랐던 걸 알게 돼 기뻐하면서 하루를 닫았다. 스트레스가 사라진, 그러나 몹시 피곤한 상태였다. 짧게 자고 일어나 수정된 보고서를 최종 버전으로 만들었다. 웬일인지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갔다. 달리자.
달리고 걷기를 반복했다. 20미터쯤 달리면 멈추고 싶다. 그래도 숨이 헐떡 거리는 순간, 달릴때 숨의 박자가 리듬을 지킬 때 몸이 원하고 있다고 느꼈다. 역시 다리가 문제다. 다리는 쉽게 피로를 알렸다. 머리는 다리를 쉬도록 해주자고 유혹한다. 머리가 떠들기 전에 다시 뛰고 멈춘다. 떠들라치면 저기까지만, 하고 또 뛰는 식으로 머리가 나를 조정하도록 두지 않았다. 그래봤자. 20분을 달리고 또 걸었지만.
내면의 상태가 안 좋다는 건 기회다. 스트레스가 마치 젖은 수건처럼 물리적인 감각, 무게로 느껴진 덕분에 뛸 수 있었다. 인간은 선하고 싶은 본능이 있는 거 같다. 누구든 섬세하게 자신을 직면할 수 있다면, 영혼이 다치고 있음을 감각할 수 있다. 인간은 스스로의 내적 회복과 성장을 위해 무엇이든 한다. 무의식은 그렇게 설계되어 있다. 영혼은 그런 우리를 무한히, 제한없이, 전적으로 돕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