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4살 되고 27살 산다 (-17)
올해 44살이 된다. 작년 나라에서 발표한 중위(중간위치) 나이가 45살이란다. 30년 전에는 28살이었으니, 그 사이 평균 수명이 17년 늘어난 셈이다. 이 기준으로 나는 올해 27살.
마음의 소란과 작별하기로
나에게는 나이도 계절도 날씨도 미세먼지도 코로나도 일상을 흔드는 요소가 되지는 않는다.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것에게 무심하게 구는 건 잘하는 편이니. 대신 마음의 소란한 말들을 따르는 오랜 습관이 있다. 마음에게 복종적인 삶이었달까. 올해는 정든 소란과 작별하기로.
27살 나는, 첫 직장을 떠나 영화사로 일자리를 옮겼는데 인생 마지막이 될 중차대한 결정이라면서 호들갑을 떨던 기억이다. 서른도 전에 마지막을 운운했다니 우습지만, 당시만 해도 20대에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키우는 그런 지난 양식을 따르는 걸 막연히 생각했던 거 같다. 실재 28살에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으니까. '막연한' 반복에는 힘이 있다.
27살을 다시 산다는 건
김미경 님 유튜브에서 중위 나이 얘길 듣고 무릎을 쳤다. 세상에, 27살을 다시 살 수 있다니. 뭐부터 할까. 여행하자, 부지런히 글 써서 책 내자, 영어 공부하자, 새로운 친구들 사귀자, 좋은 돈 벌자....
올해 계획들이지만 지금 내가 27살이라고 생각하면 더 기쁘게 도전할 수 있다. 지난 17년의 시간이 허둥지둥했던 삶을 위로해 주는 것도 같고, 더딘 나를 기다려 주는 것도 같아서.
축적하는 시간
“무엇을 하더라도 꾸준히 하라"는 흔한 말을 실천하자고 마음 먹기까지 긴 시간이 걸렸다. 빚과 우울을 관통하는 슬픔도 필요했다. 퇴사 후 브랜드 하나를 빠르게 실패하고 얻은 지혜라면 이런 것들이다.
단박에 부와 명성을 끌어당기는 행운 같은 건 없다. 공부하고 노력한 시간을 증명하는 자료와 데이터, 사고력과 판단력 그리고 점점 유려해지는 결과물이 축적되어야 겨우 몇몇의 눈에 띄게 될 것이다. 그 과정 역시 작은 실패의 연속일 거고, 어쩌면 한참 뒤에 '행운'처럼 전문성을 인정받는 소소한 평가가 있을 수 있으나(행운은 이맘때 등장할 가능성이 있다), 스스로는 완전히 만족하지 않는 상태로 꾸준히 공부하는 여정이, 성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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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투명해지는 방법, 가난
돈을 전부 쓰고 모자랄 때쯤 월급이 들어오는 삶을 18년 살았다. 일자리를 구하는 데에도 어려움이 없었고, 직장 생활 적응도 쉬운 편이었다. 회사가 마음에 안 들면 마음에 드는 친구들과 술을 마셨고, 일을 못하면 혼이 났지만 날 혼낸 선배와 저녁에 한잔 하면서 다시 친구가 됐다. 날 미워하는 사람과는 얘기하자 쿨하게 말 건네면서 별 타격감 없는 상태의 승리감을 느꼈다.
그렇지만, 돈에 있어서만큼은 늘 실패였다. 사진을 찍을 땐 라이카를, 와인을 마실 땐 샤또네프 뒤 빠프를, 집을 지을 땐 60년 된 샤리넨 튤립 체어와 식탁을 바다 건너 데려왔다. 여름이면 여름이라, 겨울이면 겨울이라 런던으로 베를린으로 치앙마이로, 교토로 떠났고 도시마다 평생 간직해야지 싶은 것들을 챙겼다. 내 삶은 그러니까 여행인지 쇼핑인지 모를 정도로 물질적인 것들로 충분했고, 비물질적인 것들은 빈약했다.
돈이 없으니 적게 먹는다. 삶은 계란과 집에서 내린 커피로 종일의 끼니를 때우면 정신이 총명해지는 기분이 따라왔다. 아 가난에는 영적 기품이 있군, 요가하는 체리에게 말했더니 "당연하지! 단식이 정신 건강에 정말 좋아." 라고 말해 주었다. 그 뒤로 적게 먹고 버티는 일을 가난의 궁상이 아니라 정신 수련의 과정으로 의미하기 시작했다.
지출 목록 기록도 시작했다. 지출 제로인 날에는 다이어리에 스티커를 붙이는데, 아이처럼 신나는 놀이라서 기다리는 시간이다.
돈을 아낄 게 아니라 벌어야지 싶어 초조한 날에는 이나모리 가즈오 말씀을 되뇐다.
수수하게 열심히 일을 하다 보면,
결국에는 일이 좋아지게 된다.
끊임없이 소란한 마음은 "재봉에 집중하려면 좀 더 폭삭한 의자가 필요해, 매일매일 기록하는 일상에는 필기감이 좋은 볼펜이 더 필요해, 한번 정도는 괜찮아 치킨을 시켜!" 유혹적인 목소리로 시끄럽다. 날 위한 말들이 아닌 걸 알아버린 후로 감정 동요 없이 무시할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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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싱어와 오프라윈프리 그리고 오쇼
오프라윈프리 영상을 보다가 받아 적은 세 가지를 올해 목표로 세웠다. 20살이 될 소녀 소년들이 다짐할 법한 얘길 받아 적고 소리내 말하면서 든든해 하는 날 보면 아직도 어린 꼬마 같아서 부끄럽고... 어이가 없어서 밉다가 싫다가 저 밖으로 밀어도 봤지만... 결국 겨우 이런 나의 손을 잡고 걸을 사람도 나 뿐이란 사실을 안다. 고립과 외로움, 희망과 가능성이 혼재된.
나를 아는 시간이길. knowing how you are
기여하는 것을 찾자. find a way to serve
늘 옳은 일을 하자. always do all right things
지난 달, 마이클 싱어 신간 <삶이 당신보다 더 잘 안다 Living Untethered>를 읽고 수많은 삼스카라를 인지하기 시작했다. 나란 방식이 호불호를 구분하고 태깅해 보관하고 새 경험을 마주할 때마다 보관함을 열어 호불호를 재확인하고 다시 범주화 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음을 알게 됐다. 아는 일은 아팠고 아프니 낫고 싶었다. 오쇼가 얘기했다.
밤이 깊을수록 일출에 가까워.
고통이 절정에 달할 때
행복과 축복이 시작되는
경계선 부근에 와 있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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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이 스승들을 모시고 산다. 가진 것 안에서 지금 바로 할 수 있는 하나를 하는 하루를 모은다. 무너지는 마음과 소박한 계획이 서로를 등지지 않고 눈맞춰 인사하는, 희미한 회복과 사랑의 형상. 이 정도 온기로나마 다시 시작할 수 있음에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