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일, 퇴사 9일차
총 18년의 직장 생활에 쉼표를 찍는다. 그간 갇힌 채로 돌보지 못한 마음과 몸을 위로한다. 대체로 열정적인 무드로 기꺼이 일했지만, 간절한 나다운 열정은 아니었을 터. 실제 나를 끌어당긴 힘은 무력감이지 않았을까. 월급이란 보상으로 무감각하길 반복한건 아닐까.
종종 출연하는 몸의 증상을 당연하게 여기고 심드렁하게 대우했다. 월요병부터 공황장애까지, 때로 불면증과 이면증도. 가장 우선에 회사의 일정에 따라 움직이는 몸과 마음이 되도록, 매일 아침부터 밤까지 회사에서 고갈될 에너지를 비축하는 데에 공들였다. 퇴사 첫 날 아이가 아파 같이 있어주는데 그 순간 날 건드린 감정은 슬픔이었다. 이토록 쉽고 당연한 일이 왜 어려웠을까. 아이들 밥을 정성껏 내어 주고 눈을 맞추고 하루 중의 재밌는 기억을 더듬더듬 찾아내고 감사의 말들을 나누는, 우리의 마음이 연결되고 다뤄지는 평밤하고 고요한 순간이 나를 이룬다는 걸 잊고 지냈다.
지난 주 목요일, 해가 뉘엇뉘엇 지는 늦은 오후에 자전거 여행을 떠났다. 대략 15키로 정도를 57분 동안 달렸고 달릴만 했다. 12키로를 통과하는 시점에 멈추고 싶은 뇌의 저항을 알아채고도 그대로 달렸더니 무아의 상태로 처음처럼의 힘이 생기는 걸 감각했다. 행복했다. 잠시 쉬었다 다시 달리기 시작할 때 쌀쌀하길래 패달을 있는 힘껏 밟아서 몸의 열을 끌어 올렸더니 금세 쌀쌀함이 가셨다. 이 과정이 당연해서 종종 잊히는 숨쉬기와 비슷한 작은 명상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언젠가 들러야지 아껴 둔 요코초에서 모듬 꼬치랑 정종을 양껏 마시고 돌아오는 길에 시계를 보지 않았다. 마치 시계의 시간 속에서 머물길 멈추고 우주의 시간 속으로 새로 걸어 들어가는 여행자같은, 아마 취했겠지만, 그런 환상의 기쁨이 더해지는 밤이었다.
퇴사 덕분에 그동안 잃었던 경험을 환대하며 공손하게 대우하는 날들이다. 나답게 산다의 시작이라고 하면 비장하고 하고 싶은 일을 한다의 시작이라면 어린애같지만, 아무튼 시작의 시작이라고 적는다. 나다움을 발견하는 과정을 콘텐츠화해 공유하고 아이디어를 실험하는 프로젝트 서너개를 기획 중이다. 당연히 혼자서 해내기는 어려우니 여럿을 만나고 있다. 먼저 12월, 실험의 첫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데까지 기대만큼의 두려움과도 협업하기로 한다.
위워크, 광화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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