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뚫린 듯 비가 퍼붓던 날, 퀵 아저씨가 장판같이 두껍운 우비를 걸치고 터벅터벅 걸어 들어왔다. 땅이 꺼질듯 거친 한숨을 내뱉고는 그가 말했다. “오늘 또 한명 갔어. 젠장. 아 진짜 조심히 좀 다니라니까. ”
누군가 빗길에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는 얘긴가 보다. 무슨 말로 위로를 드려야 할지 몰라 망설이다가 “빗길인데 조심하세요.” 라고 겨우 소리 내었다.
비보호 좌회전
다른 방도가 없다. 땀으로 범벅이 된 채 죽을힘을 다해 달리다가 급한 대로 택시를 잡아탄다. 하지만 이미 늦을 대로 늦은 뒤. 이게 얼마나 중요한 건줄 아냐며 코앞에 서류 봉투를 거칠게 흔들며 으르렁대던 여자는 앞으로 거래하지 않겠다는 쉬운 결정을 내리고는 휙 떠난다.
그간 얼마나 많은 필름, 테잎, DVD 들을 영화제, 상영회, 개봉관으로 서울, 대구, 부산, 분당을 마다치 않고 퀵서비스를 통해 전달했을까. . 전국 각지로 가장 빠른 서비스를 ‘빨리빨리’ 부르고 보채고 따지고 깎으며 이용한 고객인 나는 그들에게 진심의 인사를, 절실한 안부를 건네보긴 했을까.
친구사이 파주
부산에서 본 많은 영화들은 택배 아저씨부터 스무 살 게이커플까지 내가 아닌 남의 사연을 조곤조곤 얘기한다. 왜 이제야 다른 사람들의 사연이 들리는 걸까.....
얼마나 긴 시간동안 나 혼자밖에 모르고 살았냐하면 말로 꺼내놓기 부끄러워 어딘가로 숨어야 할 지 모르겠다. 누군가의 고민은 간결한 조언 한마디로 끝냈고 남의 단점을 쉽게도 꼬집었다. 남의 걱정은 내 것이 아니었고 똑같지 않은 것엔 공감하지 않았다. 그렇게 일방적이고 내 중심적으로 세상을 살고 있는 이상한 나를 PIFF 영화들이 거울이 돼 비췄다.
여행자 산책가
<친구사이>의 밀리터리 게이 커플도, <파주>의 결코 이룰 수 없는 사랑을 나눈 형부와 처제도, <피시탱크>의 방황하는 15살 소녀도, <산책가>의 앞 못 보는 꼬마도, <여행자>의 고아원서 아빠를 기다리는 진희도. 모두 나보다 몇 겹은 두터운 이야기를 품고 산다.
그러면서도 <닿을 수 없는 곳>의 어린 가장은 아픈 엄마와 어린 동생 그리고 집 나간 아빠까지 모두 제 품안에 끌어안는다. 이들 모두는 짊어진 무게가 벅차도 위로를 구하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혼자의 몫으로 받아들인다. 세상의 편견에 당당하게 맞서고 심지어 행복한 노래로 마땅히 아픔을 삼킨다. 땅 속에 제 몸을 묻어버릴 만큼 모든 걸 놓고 싶던 어린 소녀조차도 결국 세상 속 자기만의 오솔길을 찾아 천천히 걷는다.
세상은 많은 사람들이 함께 사는 것임을 작품으로 일깨운 감독들의 깊은 혜안에 고개가 숙여진다. 이번 PIFF 방문에서 더 늦기 전에 타인의 손을 잡을 것을 경고 받은 셈이다. 영화가 들이민 엘로 카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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