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봐주는 아주머니가 아침 준비를 서두르는 동안 정희는 유연한 손놀림으로 피아노 연습에 한창이었다. 정희의 꿈은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돼 전 세계를 누비며 공연하는 것이었다. 국민학교, 중학교 시절 내내 반장 자리를 놓쳐본 적이 없는 모범생 정희는 부모님에게 늘 자랑스런 자식이었다. 결혼 8년 만에 얻은 귀한 딸이었기에 부모님의 큰 사랑과 관심을 받았다.
사시사철 원두커피 향이 그윽했던 부유한 집안의 맏딸로 태어나 금이야 옥이야 어여쁘게 자란 정희가 바로 나의 엄마다.
동네 피아노 선생님으로 이름 날린 엄마지만...
엄마에게 불운이 닥친 건 그리 멀지 않은, 그러니까 엄마 나이 열여섯 살 때였다. 할아버지가 고혈압으로 돌아가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할머니 역시 같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엄마는 말할 수 없이 큰 충격에 빠졌지만 슬퍼할 틈도 없이 어린 두 남동생을 돌봐야 했다. 그렇게 엄마의 삶은 꿈과 조금씩 멀어져갔다.
어린 동생들의 엄마 역을 도맡아 학비와 식비를 책임지며 힘겹게 생활하던 엄마는 이십대 중반에 아빠를 만나 연애를 하고 곧 결혼을 했다. 그리고 세 딸을 낳았다. 그렇게 육아에 파묻혀 살았느냐? 아니다. 엄마는 아이 셋을 키우는 바쁜 몸이었지만 시간을 쪼개 동네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시집올 때 가져온 유일한 혼수품인 피아노로. 엄마는 할머니의 유언대로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되진 못했지만 강원도 삼척에서 미모의 피아노 선생님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엄마의 가슴 속에는 언제나 더 큰 세상 속으로 뛰어들고 싶은 뜨거운 그 무엇이 존재했다. 매일 밤 남편을 손꼽아 기다리는 아내 대신, 당당히 제 일을 갖고 사는 사회인으로 살고 싶던 엄마. 막내인 내가 유치원에 입학함과 동시에 엄마는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아마 내가 다섯 살 되던 해였을 거다.
늘 내게 넘치는 칭찬과 포옹을 주었던 엄마
유치원이 문을 여는 시간보다 일찍 출근해야 했던 엄마는 매일 아침 나를 옆 동네에 살던 같은 반 친구네 집에 맡겼다. 그 시간은 친구가 엄마 품에 안겨, 알록달록한 머리핀으로 머리 단장을 할 때였다. 어린 내게 그 모습이 참 못마땅했었나 보다. 나는 아침이면 그 집에 가지 않겠다고 먼지바닥에 뒹굴며 서럽게 울었다. 이런 내가 더 안됐고, 미안했을 엄마는 언제나 손재주가 좋은 막내, 야무진 막내, 착하고 예쁜 막내로 날 치켜세워 주었다. 나는 철이 들어갈수록 혼자 노는 시간이 많았지만, 다행히 넘치는 칭찬 속에 신나게 춤추고 많이 웃는 아이가 되었다.
어린 시절, 일하는 엄마와 함께 만든 추억은 많지 않았지만, 엄마는 내게 의견을 먼저 묻고 잘 들어주는 자상한 사람이었다. 나는 누구에게도 말 못할 고민이 끝끝내 풀리지 않을 땐 그런 엄마를 찾았고 고민의 실타래를 풀어갔다. 혼자 떠돌던 먼 여행, 미술대학 진학, 조건이 덜한 새 직장에 대해서도 엄마는 언제나 내 뜻을 응원했다.
출산 후에야 '일하는' 엄마를 이해하게 됐어
그런 엄마, 도저히 내가 닮을 수 없을 것만 같았는데 나도 엄마가 됐다. 지난 10월, 반나절이 넘는 긴 시간 동안 진통 끝에 결국 제왕절개로 아기를 낳은 것. 수술 후 회복이 늦은 탓에 나는 사흘이 지난 뒤에야 아기를 겨우 안아볼 수 있었다. 얼굴이 울긋불긋한,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몸이 자그마한 아기였다. 눈을 뜨는 것조차 힘겨워하는 아기에게 처음으로 젖을 물렸다. 그 기분을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경이로운 출산과 첫 수유에 이어 나는 고단하지만 피할 수 없는 육아의 길로 접어들었다. 하루에 열 번씩 기저귀를 갈고, 여덟 번씩 젖을 물리고, 네 번씩 젖병을 소독하고, 두 번씩 빨래를 한다. 이런 일상 속에서 '아기를 낳고 나면 세상이 참 다르게 보일 거야'라던 엄마의 말대로 내 시선은 조금 더 깊게 그리고 넓게 변화하고 있는 중이다.
산후조리 기간 동안 친정엄마 대신 조리원과 시어머니의 힘을 빌었다. 일하는 우리 엄마가 손주를 보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원망할 법도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나 역시 곧 일하는 엄마가 될 테니까. 아픈 아이를 두고 회사에 꾸역꾸역 갈 일도 있을 것이고, 어린이집 행사에 참석하지 못할 수도 있다. 내가 크는 동안 엄마가 할 수 없었던 일들을 나 역시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안해하지 않으련다. 왜냐하면 지금의 엄마를 보면 자랑스러우니까.
그녀를 닮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일
지난 8월 엄마가 새 피아노를 장만했다. 피아노는 내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친정집 작은 방에 놓였다. 엄마는 매주 금요일 저녁마다 곧 시작될 성당 성가대 반주를 위해 스무 살의 음대생에게 피아노 교습을 받는다. 날렵했던 손가락은 단단히 굳었고, 흐릿해진 시야 때문에 악보 속 움직이는 음표를 따라잡기 힘들다는 엄마. 하지만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다.
이런 엄마를 닮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환갑을 넘긴 지금까지도 아침 여섯 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일터로 향하는 그 부지런함을, 까맣게 잊었을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며 새로 연습을 시작한 그 열정을, "중고로 사려다가 우리 손자 나중에 줄까 싶어 좋은 걸로 샀지" 하며 활짝 웃어 보이는 그 포근함을 꼭 닮고 싶은데 말이다.
곧 출산휴가도 끝이 난다. 회사 복직을 앞둔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이 아기를 두고 어딜 가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싶어 마음이 천근만근이다. 품에 안으면 두 번도 말아 들어갈 듯 작은 아기를 떼어놓기가 아쉬워 벌써부터 꼭, 아주 꼭 품에 안는다. 이제야 비로소 어릴 적 나를 떼어놓고 힘겹게 뒤돌아 일터로 향했던 했던 엄마의 심정이 되어본다.
지금도 잊히지 않는 그날, '으앙' 하고 울던 내 눈동자에 비친 엄마의 낮고 슬픈 눈빛과 다시 마주할 수만 있다면 난 이렇게 얘기하고 싶다.
"엄마, 즐겁게 다녀와. 내 걱정은 하지 말고요. 엄마 마음 다 아니까."
* 오마이뉴스 기사로 등록된 글
사시사철 원두커피 향이 그윽했던 부유한 집안의 맏딸로 태어나 금이야 옥이야 어여쁘게 자란 정희가 바로 나의 엄마다.
동네 피아노 선생님으로 이름 날린 엄마지만...
엄마에게 불운이 닥친 건 그리 멀지 않은, 그러니까 엄마 나이 열여섯 살 때였다. 할아버지가 고혈압으로 돌아가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할머니 역시 같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엄마는 말할 수 없이 큰 충격에 빠졌지만 슬퍼할 틈도 없이 어린 두 남동생을 돌봐야 했다. 그렇게 엄마의 삶은 꿈과 조금씩 멀어져갔다.
어린 동생들의 엄마 역을 도맡아 학비와 식비를 책임지며 힘겹게 생활하던 엄마는 이십대 중반에 아빠를 만나 연애를 하고 곧 결혼을 했다. 그리고 세 딸을 낳았다. 그렇게 육아에 파묻혀 살았느냐? 아니다. 엄마는 아이 셋을 키우는 바쁜 몸이었지만 시간을 쪼개 동네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시집올 때 가져온 유일한 혼수품인 피아노로. 엄마는 할머니의 유언대로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되진 못했지만 강원도 삼척에서 미모의 피아노 선생님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엄마의 가슴 속에는 언제나 더 큰 세상 속으로 뛰어들고 싶은 뜨거운 그 무엇이 존재했다. 매일 밤 남편을 손꼽아 기다리는 아내 대신, 당당히 제 일을 갖고 사는 사회인으로 살고 싶던 엄마. 막내인 내가 유치원에 입학함과 동시에 엄마는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아마 내가 다섯 살 되던 해였을 거다.
늘 내게 넘치는 칭찬과 포옹을 주었던 엄마
유치원이 문을 여는 시간보다 일찍 출근해야 했던 엄마는 매일 아침 나를 옆 동네에 살던 같은 반 친구네 집에 맡겼다. 그 시간은 친구가 엄마 품에 안겨, 알록달록한 머리핀으로 머리 단장을 할 때였다. 어린 내게 그 모습이 참 못마땅했었나 보다. 나는 아침이면 그 집에 가지 않겠다고 먼지바닥에 뒹굴며 서럽게 울었다. 이런 내가 더 안됐고, 미안했을 엄마는 언제나 손재주가 좋은 막내, 야무진 막내, 착하고 예쁜 막내로 날 치켜세워 주었다. 나는 철이 들어갈수록 혼자 노는 시간이 많았지만, 다행히 넘치는 칭찬 속에 신나게 춤추고 많이 웃는 아이가 되었다.
어린 시절, 일하는 엄마와 함께 만든 추억은 많지 않았지만, 엄마는 내게 의견을 먼저 묻고 잘 들어주는 자상한 사람이었다. 나는 누구에게도 말 못할 고민이 끝끝내 풀리지 않을 땐 그런 엄마를 찾았고 고민의 실타래를 풀어갔다. 혼자 떠돌던 먼 여행, 미술대학 진학, 조건이 덜한 새 직장에 대해서도 엄마는 언제나 내 뜻을 응원했다.
출산 후에야 '일하는' 엄마를 이해하게 됐어
그런 엄마, 도저히 내가 닮을 수 없을 것만 같았는데 나도 엄마가 됐다. 지난 10월, 반나절이 넘는 긴 시간 동안 진통 끝에 결국 제왕절개로 아기를 낳은 것. 수술 후 회복이 늦은 탓에 나는 사흘이 지난 뒤에야 아기를 겨우 안아볼 수 있었다. 얼굴이 울긋불긋한,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몸이 자그마한 아기였다. 눈을 뜨는 것조차 힘겨워하는 아기에게 처음으로 젖을 물렸다. 그 기분을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경이로운 출산과 첫 수유에 이어 나는 고단하지만 피할 수 없는 육아의 길로 접어들었다. 하루에 열 번씩 기저귀를 갈고, 여덟 번씩 젖을 물리고, 네 번씩 젖병을 소독하고, 두 번씩 빨래를 한다. 이런 일상 속에서 '아기를 낳고 나면 세상이 참 다르게 보일 거야'라던 엄마의 말대로 내 시선은 조금 더 깊게 그리고 넓게 변화하고 있는 중이다.
산후조리 기간 동안 친정엄마 대신 조리원과 시어머니의 힘을 빌었다. 일하는 우리 엄마가 손주를 보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원망할 법도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나 역시 곧 일하는 엄마가 될 테니까. 아픈 아이를 두고 회사에 꾸역꾸역 갈 일도 있을 것이고, 어린이집 행사에 참석하지 못할 수도 있다. 내가 크는 동안 엄마가 할 수 없었던 일들을 나 역시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안해하지 않으련다. 왜냐하면 지금의 엄마를 보면 자랑스러우니까.
그녀를 닮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일
지난 8월 엄마가 새 피아노를 장만했다. 피아노는 내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친정집 작은 방에 놓였다. 엄마는 매주 금요일 저녁마다 곧 시작될 성당 성가대 반주를 위해 스무 살의 음대생에게 피아노 교습을 받는다. 날렵했던 손가락은 단단히 굳었고, 흐릿해진 시야 때문에 악보 속 움직이는 음표를 따라잡기 힘들다는 엄마. 하지만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다.
이런 엄마를 닮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환갑을 넘긴 지금까지도 아침 여섯 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일터로 향하는 그 부지런함을, 까맣게 잊었을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며 새로 연습을 시작한 그 열정을, "중고로 사려다가 우리 손자 나중에 줄까 싶어 좋은 걸로 샀지" 하며 활짝 웃어 보이는 그 포근함을 꼭 닮고 싶은데 말이다.
곧 출산휴가도 끝이 난다. 회사 복직을 앞둔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이 아기를 두고 어딜 가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싶어 마음이 천근만근이다. 품에 안으면 두 번도 말아 들어갈 듯 작은 아기를 떼어놓기가 아쉬워 벌써부터 꼭, 아주 꼭 품에 안는다. 이제야 비로소 어릴 적 나를 떼어놓고 힘겹게 뒤돌아 일터로 향했던 했던 엄마의 심정이 되어본다.
지금도 잊히지 않는 그날, '으앙' 하고 울던 내 눈동자에 비친 엄마의 낮고 슬픈 눈빛과 다시 마주할 수만 있다면 난 이렇게 얘기하고 싶다.
"엄마, 즐겁게 다녀와. 내 걱정은 하지 말고요. 엄마 마음 다 아니까."
* 오마이뉴스 기사로 등록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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