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살 반부터 외가에서 살다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어 엄마가 나를 데려가기 위해 외가에 왔을 때의 일이라고 했다. 막 일곱 살이 된 나는 엄마가 온다는 사실을 안 순간 신발도 신지 않고 단숨에 집 밖으로 달려 나가더라고 했다. 그 길로 3백미터쯤 떨어진 작은 외가 집으로 달려가 곧바로 그 집 안방으로 뛰어 들어갔다고 했다. (...) 이불 밑으로까지 몸을 숨기더라고 했다. 작은 외할머니가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엄마가 잡으러 왔다.”고 대답했다고 했다. 김형경 <사람 풍경>
Jake and Mom by Norma Kramer
대충 가방을 내려놓고 집 앞 놀이터로 나와 한참을 놀았고, 나영이는 이제 집에 가야 한다고 했다. 또 혼자구나. 난 고개를 푹 숙이고는 나영이의 뒤통수에다 “우리 엄마가 나 찾으면 가출했다고 전해줘.” 라고 말했다.
나영이는 놀랐고 나는 몸을 숨기기 위해 나무 덤불 사이를 살폈다. 초등학교 6학년, 13살 때의 기억이다.
맞벌이를 하는 엄마 아빠는 한 밤이 돼서야 집에 왔고 나머지 시간동안은 언제나 혼자였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큰 언니는 한창 입시 공부를 전념했을 것이고, 막 친구가 더 좋아졌을 작은 언니는 노느라 바빴을 거다.
그대부터 이미 난 ‘회피’라는 방어기제로 자신을 보호했나보다. 위험하거나 고통스러운 감정, 상황, 대상으로부터 안전한 거리를 유지하려는 태도. 회피 방어기제는 유아기 때 형성되는 정서이며 그때 아기에게 고통스러운 감정, 상황, 대상은 엄마가 만드는 환경이라고 한다. 당시 나도 엄마와 일찍 분리된 것에 대한 불안과 분노가 숨거나 도망치는 것으로 표출됐으리라.
여행의 습관은 일종의 방어의식이었다. 삶의 한가운데로 뚫고 들어가지 못해, 내면의 고통과 직면하지 못해 어디론가 도망치고자 하는 행동이었다. 표면적으로 그 여행은 정신분석에서 알아낸 많은 것들을 몸과 마음으로 체험하고 넘어서는 시간을 갖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내적으로는 분석을 받으며 헤집어진 고통스러운 감정, 아직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 수 없는 혼돈스러운 삶으로부터 멀리 도망친 행동이었다. 그런 방어 의식을 전문용어로 회피라고 한다. 역시, 김형경 <사람 풍경>
회피의 특징인 방랑벽 역시 그대로 적용된다. 방문을 걸어 잠그고 일주일 넘게 방안에만 틀어 박혀 지낸 스물 하나 그즈음에 느닷없이 런던의 민박집으로 훌쩍 떠났다. 난생 처음 이국의 땅을 밟고도 두려움 제로의 해방감을 느꼈고 지금도 종종 그 기분을 떠올려본다.
그곳에서 여행자의 옷을 빨고 밥을 짓고 방을 치워 번 돈으로 한 달 남짓 혼자 여행을 갔다. 그 뒤로 수차례 혼자 떠난 낯선 길. 그곳에서 느끼는 편안함이 반복됐다. 지금도 불현듯 답답하거나 불안할 때 현실이 내 뜻과 다르다고 느껴질 땐 어김없이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 이 모든 게 회피, 도망치고자 함이다.
영원히 자기 삶 바깥에서 서성이게 만들 회피라는 방어의식을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책은 말해주지 않는다. 다만 여행자, 자유를 꿈꾸는 영혼 같은 수식을 붙여 두둔했던 나의 약한 내면을 오롯이 직시하게 되었다. 이 다음은 모두 내 몫인 듯싶다.
콤플렉스, 자기애, 동일시, 자기 존중 같은 내면을 바로보게 도와준 고마운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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