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에 읽는 소심한 철학책, 내용 중에
노자의 철학으로 ‘기관 없는 신체'를 해석하자면, 경계를 없애라는 이야기다. 우리 대부분은 자의적 경계 안에 자신을 가두고서 그것을 정체성으로 끌어 안는다. 들뢰즈에게 자아는 ‘나'의 존재론적 지위가 아닌 그저 ‘주어'의 문법적 지위에 불과하다. 고정된 주체는 없다. 마주친 우연과 나누는 대화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성질을 획득하는 ‘과정으로서의 분열증'만이 존재할 따름이다.
우리는 자유로운 선택을 한다고 착각하지만, 실상 자신이 겪은 한정된 범주 안에 종속된 타협을 추구하는 경우가 많다. 마치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알기 전의 인류처럼, 미지의 경계 밖으로 벗어나는 것을 추락으로 간주한다. 그래서 발전 가능성은 언제나 자신의 기억이나 자신의 발을 걸고 있는 사회의 통념 안에서만 재고된다. 그 지평의 경계 안을 자신으로 알고 살아가는 주체에게 ‘밖’의 가능성이 다가올 리 없다.
들뢰즈가 지적하는 인간 최고의 문제점은 ‘자의식’이다. 자의식이 강할수록 새로운 세계와 연결되기는 더욱 힘들다. 자신의 신념에 반하는 낯선 우연들 속에 자신의 운명이 놓여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수평선 밖으로 나아간 콜럼버스가 세계를 발견했듯 말이다. 그렇기에 자신의 정체성으로 끌어안고 있는 모든 가치들에게 벗어나볼 필요도 있다. “사유는 밖에서 온다.”는 들뢰즈의 어록은 경험론을 이르는 것이 아니다. 이미 내 안에 잠재된 것이 나의 밖에 존재한다는, 이 아리송한 들뢰즈의 표현이 지닌 함의는 외부에서 다가오는 사건이 잠재한 나의 성장 가능성이다. 너의 운명은 너의 경험을 초월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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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원래 이런 사람이야.”
가깝든 멀든 자주 듣는 말이고 자주 뱉는 말이기도 하다. 당신을 더 깊이 알고 싶어요, 하는 상대에게 하나로 설명되게 유도하는 말이라 단절의 의미가 담겼다고도 느낀다. 누군가 나에게 이 빵 맛있어, 라고 말할 때 나는 팥빵은 안먹어, 라고 대답한다면? 정말 팥빵을 안 먹더라도 추천해준 이의 마음, 또는 내가 아는 팥빵이 전부가 아니라는 허용, 그래서 나의 운명을 초월하는 내가 모르는 팥빵의 세계를 경험하게 되는 가능성을 버리고 나 자신을 팥빵을 안먹는 사람으로 가두는 일이니까. 이런 식의 스스로를 단정적으로 설명하는 이들과의 관계는 깊이 알수록 멀어지는 아이러니다.
이런 나란 사람은 또 얼마나 원래의 ‘나' 안에 갇힌 존재인가.
좋은 잠을 자지 못해 뒤척이다가 약 먹듯 철학책을 넘기며 사유는 밖에서 오는 것이라고, 나의 경험을 초월해 보자고 생각한다. 피곤이 그대로인 몸을 일으킬 힘을 챙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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