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uses at Auvers, c.1890
그러니까.. 이런거에요. 고흐의 그림도 찬란하고 르느아르의 그림도 찬란한데요. 만약 간디가 고흐와 르누아르의 그림을 나란히 놓고 본다면 르느아르 그림엔 침을 뱉고, 고흐의 그림은 참 좋아할 것 같은 거죠. 그게 바로 내가 말하고 싶은 고흐 그림이 갖는 보편성인데요. 그림이 어떻게 보면 참 유치하죠. 거칠고 원색적이고요. 그런데 유치하기 때문에 찬란한, 보편적인 감동을 줘요.
박홍규 교수가 이 얘길 꺼낸 건, 빈센트 반 고흐가 쓴 900여 통의 편지 중 일부를 번역해 엮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편지> 출간을 기념하는 자리에서였다.
간디에 관한 책을 준비하느라 인도에 잠시 머물던 얘기를 하던 그는 인도의 현대 미술관에서 고흐의 자화상을 그려 놓은 한 작품과 마주쳤다고 했다. 이어 르느와르와 고흐의 찬람함을, 간디를, 그리고 고흐 그림이 갖는 보편성을 설명했다. 그날 들은 수많은 얘기 중에 난 유독 이 ‘찬란함의 차이’에 마음이 동요된다.
Trees in the Garden of St. Paul's Hospital, 1889
예술에도 적용된 비판적인, 비판적 그림읽기의 자세에 강한 인상을 받은 탓인 듯싶다. 거장이라는 이름 아래 천재성을 오롯이 찬양하는 넘치는 수식어들을 거리낌 없이 받아들여 온 나는. 고흐(뿐 아니라 여러 예술가들)라는 인물을 탐구하기보다 그림 차체로 느껴지는 일시적인 감정에 충실했었으니까.
박홍규 교수는 고흐가 미친 천재 화가의 이미지로만 강조되는 게 안타깝다며 그간 파헤쳐온 고흐의 삶과 내면의 얘길 들려주었다. 원시적 기도교관을 숭배했고 때론 자학을 감행한 믿음의 실천. 베풂과 나눔을 통한 검소한 생활관. 하지만 고약한 싸구려 압생트와 담배 그리고 매춘으로 이룬 방탕했던 삶의 이면. 언제나 외톨이었던 그가 예술에 자신을 던질 수밖에 없었던 절실함. <부처 고흐>에서도 보이는 욕망을 근절하는 상징인 부처에 대한 대단한 존경심 같은 것들...
덕분에 고흐에 대한 오해와 몰이해에서 조금은 해방된 느낌이다. 이제야 르느아르의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찬란함과 고흐의 구도, 형식을 파괴한 파괴적인 찬란함이 손에 잡히는 듯하다.
자연의 곱슬머리로 단발을 하고 하얀 턱 수염을 그대로 둔 채 강의실로 들어온 박홍규 교수. 노동법을 전공한 그가 그림과 화가를 가슴으로 느끼고 행동에 옮기는 자세가 그의 겉모습만큼이나 인상적이었다. 그림 하나에 얽힌 역사, 인물, 사건 등 방대한 지식의 양도 그렇지만, 올곧은 가치관을 기본에 두고 자기 판단과 비판에 정확한 자세도 본받고 싶었다.
그가 들려준 마지막 얘기는 멈추지 않고 계속, 끝까지 꿈틀거리라는 조언이기에 노트에, 가슴에 그대로 적어 놓는다.
예술을 지망하는 계기가 막연하게 재주가 있어서 단지 하고 싶어서 예술가 이미지에 대한 동경 때문에 라는 자세는 나이브해요. 자기의 일을 시작하는 과정에서 고흐의 절실함, 예술에게 자신을 던질 수밖에 없는 절실함을 가져보자는 거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편지 - 빈센트 반 고흐 지음, 박홍규 옮김/아트북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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