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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ary/하루마다

일의 기쁨

@초록댄서 스튜디오

 
꼬박 12시간을 만들었다. 오후 4시부터 밤 9시까지는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르게 지났다. 해야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의 경계에서 오직 나와 대화했다. 요구하거나 꾸짖는 소리 없이 조곤 조곤 의견을 나누는 거 같았다. 지난 몇 달간 내면에 일어난 가장 큰 변화라면 나와의 불화가 조금씩 옅어진다는 사실이다. 누구의 요구도 조건도 보장된 득도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능동적으로 움직여지는 경험이 오랜만이라 기분이 좋았다.
 
오늘이 꽉 찬 하루가 되기까지 두 가지 포인트가 있다. 하나는 5/1일에는 종일 일한다고 선언한 것. 평소 출근하는 사람처럼 8시간 이상 일해보기로 수시로 알렸다. 종일 일할 수 있는 날이 얼마나 간절했으면 기다릴 지경이었다. 다음은 나름 익숙해진 단순 작업을 가장 처음 순서로 잡고 해치운 것이다. 자리에 앉자마자 하루 최소 수량 5개를 만든다는 목표보다 2개를 더해 7개를 만들었다. 40분 타이머 두 번 안에 끝내겠지 했는데 세 번만에 마쳤다.
 
문득, 빠르게 해내면 실력이 좋은 건가 물었다.
 
미나가와 아키라가 “빨리 해, 내일 까지 무조건 끝내!” 같은 시간 대비 작업량을 목표로 일할 거 같진 않은 거다. 오히려 얼마큼 작은 부분까지 공들일 수 있는지 그 방법을 깨닫고, 일하는 사람의 마음이 그것을 해내도록 살피는 데 노력할 거 같은 거다. 디테일을 챙기는 가장 효율적인 공정 과정을 세우고, 소요되는 시간을 적확하게 계산해 하루 계획 안에 마련하지 않을까. 이것이야 말로 최고 수준의 실력이 아닐까.
 
실재 이렇게 까지 해야 되나 싶게 칼재단을 하고 박음선을 표시해 작업한 결과물은 눈이 부시게 반듯하다. 이 눈이 부신 결과물이 나오는 과정이 당연해지면 속도전으로 얻은 물량의 규모보다 더 큰 가치를 얻을 수 있게 될 거 같았다. 내 브랜드에 대한 자긍심, 나란 사람의 효용감, 사용자의 만족도, 제품의 신뢰, 재구매로의 연결, 팬의 사랑 같은.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는 것과 비슷하게, 작은 것을 바라봐주고 물리적인 시간을 아까워말고 더 더 더 함께 해 주는 거, 내가 하고 싶은 게 어쩌면 사랑인가 생각했다. 
 

 
12시간을 일했더니 어깨에 12명 정도가 앉은듯 무겁길래, 아들아 걸을까 물었다.  달이 예뻐서 한 바퀴만 걷고 싶어, 했더니 따라 나서 주었다. 오는 잠을 뒤로 미루고 내 손을 잡아준 아들이 고마워서 눈가가 촉촉해졌다. 
 
일하는 중에 17시간 59분에 달하는 <배움의 발견> 오디오북을 들었다. 이 책을 쏜살같이 읽었을 때가 4-5년 전이다. 타라가 케임브리지에 가서 스타인버그 교수를 만나는 장면에서 엉엉 울었던 기억이다. 다시 읽으니 나의 몰입이 타라에서 그의 아빠와 엄마, 오빠들에게까지 확장되었다. 그녀에게 기회를 준 사람들, 타일러 오빠 그리고 스타인버그 교수가 등장할 때는 가슴이 크게 뛰었다. 누군가에게 기회를 주는 사람이 되는 것이 나의 다음 숙명이다, 라고 믿고 싶어졌다. 이 어려운 목표를 향해 그저 포함하고 포함하는 하루를 살자고 생각했다. 
 
절대 침묵 속에서 그 어느때보다 멀고 깊은 곳에 다다른 기분이 든다. 일의 기쁨은 가볍게 달뜨는 감정과는 거리가 먼, 자꾸 눈물이  흐를 것처럼 무겁지만 비관도 낙관도 없이 그저 해낼 때 얻어지는 침착함이기도 하다고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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